그렇게 되어감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 순간이 있다.
필연적인 귀결이란 것이 눈에 보임에도 벗어날 수 없는 순간이 있다.
기쁨보다 슬픔일 확률이 더 높았던 그 순간들이 다시금 눈 앞에 나타날 때면
나는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
그렇게 되어감의 끝을, 필연적인 귀결이라는 것의 모습을 왜곡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구기고 잘라내 어떻게든 내 그릇 안에 채워 넣으려고 한다.
그것이 행복일 수 있는가. 피하지 않고 앞으로 나간다는 그럴싸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앞에 있는 출구가 아닌 그 출구의 형상을 자신의 눈에 그리고 가슴에 집어 넣는다고
그것이 이룸을 의미하고 그 이룸이란 것이 행복으로 이어질 수 있단 말인가.
어찌할 수 없을 때는 순수해져야 한다. 온전하게 매료 되었었다면 온전하게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거기에 자족이 있고, 거기에서 행복이란 것의 표상을 멀리서나마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놓아야 할 때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다가오는 자유로워짐으로부터 행복의 편린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지금, 우리는 비로소 비교적 행복하게 된다.
나는 순자형이 말했던, 사람은 천성적으로 악하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홉스형도 말했지만 인간이 생존권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그리고 지구가 무한맵이 아닌 이상, 내가 아닌 타인은 나의 생존을 위해 언제든 죽어 줘야 하는 후순위 존재일 뿐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은 자연권이란 본능 앞에 순리라고 하면 순리란 말이다. 따지고 보면 생명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에서 사람이 근본적으로 악하니 선하니를 따지고 앉아 있는 것은 사회란 조직의 존속을 위해 위정자들이 교육하고 있는 프레임에 불과하다. 선과 악에 앞서 생존과 소멸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그 프레임 안에서 우리는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개인을 악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사회를 경험하고 관찰하다 보면 실제로 사람들은 자신의 생존만을 위해 살아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가끔 자식이나 부모를 위해 희생하기도 하고, 대의란 것을 위해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스스로 져버리고 사그라 들기도 한다. 가끔은 폭탄을 안고 뛰어들어 누군가를 위해 망설임없이 목숨을 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들을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듯 인간은 악하다는 명제의 반례로 들이밀 수 있는 것일까. 노노
앞에서 말한 예시들에 정확한 boundary를 설정하고 좀 더 명확화해 보면 사람들은 딱 자신의 중심으로 의미있는 범위 안의 사람만을 위해 희생을 감수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단지 사람별로 그 범위가 다를 뿐이다. 자식이나 부모를 위해 대신 죽는 사람은 그 의미있는 범위가 가족일 뿐이고, 인샬라를 외치며 몸을 던지는 사람들의 의미있는 범위는 종교일 뿐이다. 만약 사람이 천성적으로 선하다고 하다면 반대로 그 범위란 것은 자신에게 의미없는 것들을 의미하게 되고 그것에는 주로 적대적인 대상이 속해야 한다. 인간이 천성적으로 선하다면 그 범위는 0이거나 최소한 전체의 서브셋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이 과연 그러한가. 의미없는 것들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들을 제외하고는 그보다는 반드시 클 여집합 모두를 위해 살아가고 또 목숨을 바치기도 한다고 말할 수 있느냔 말이다. 그렇지 않다. 이것은 직관적이다. 단연코 내 인지의 범위 내에서 그 반대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그 범위의 반지름을 0에서 부터 시작해 가장 먼저 엄마,아빠을 그리고 점점 형, 누나, 동생, 친구, 선생님과 같은 타인을 자신의 의미있는 범위에 편입시켜가며 반지름을 늘려간다. 이후 교육에 의해 국가와 중교와 세계에 대한 인식들이 편입되어 가고 그 범위 안의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게 되어 가는 것이다.
당연히 선의 부재가 악의 존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생존을 위해 개인이 발버둥 칠 때 그 개인의 의미있는 범위 밖에 있는 사람은 그 살고자 발버둥치는 사람을 악이라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생존은 곧 내가 누릴 기회와 자원이 줄어듬을 의미하니까.
우리가 사람과 만나고, 연을 만들고, 이어 나가는 것은 그 의미있는 범위에 서로가 속하게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길거리에서 사시미를 휘두르는 조폭이라도 자신의 의미있는 범위의 사람들에게는 가슴 따뜻할 것이고, 그 옛날 신하와 백성들을 발 밑의 개미처럼 쉽게쉽게 죽이라 명했던 폭군들도 자신의 의미있는 범위의 사람들에게는 애틋했을 것이듯, 일반적인 사람들은 되도록 많은 사람들의 의미있는 범위에 들어가고자 노력하며 그럼으로써 자신의 영속적인 안전을 보장받고자 노력한다.
....처절한 고독이 과연 진정한 자유를 의미하는 걸까.
사회를 경험하고 관찰하다 보면 실제로 사람들은 자신의 생존만을 위해 살아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가끔 자식이나 부모를 위해 희생하기도 하고, 대의란 것을 위해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스스로 져버리고 사그라 들기도 한다. 가끔은 폭탄을 안고 뛰어들어 누군가를 위해 망설임없이 목숨을 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들을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듯 인간은 악하다는 명제의 반례로 들이밀 수 있는 것일까. 노노
앞에서 말한 예시들에 정확한 boundary를 설정하고 좀 더 명확화해 보면 사람들은 딱 자신의 중심으로 의미있는 범위 안의 사람만을 위해 희생을 감수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단지 사람별로 그 범위가 다를 뿐이다. 자식이나 부모를 위해 대신 죽는 사람은 그 의미있는 범위가 가족일 뿐이고, 인샬라를 외치며 몸을 던지는 사람들의 의미있는 범위는 종교일 뿐이다. 만약 사람이 천성적으로 선하다고 하다면 반대로 그 범위란 것은 자신에게 의미없는 것들을 의미하게 되고 그것에는 주로 적대적인 대상이 속해야 한다. 인간이 천성적으로 선하다면 그 범위는 0이거나 최소한 전체의 서브셋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이 과연 그러한가. 의미없는 것들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들을 제외하고는 그보다는 반드시 클 여집합 모두를 위해 살아가고 또 목숨을 바치기도 한다고 말할 수 있느냔 말이다. 그렇지 않다. 이것은 직관적이다. 단연코 내 인지의 범위 내에서 그 반대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그 범위의 반지름을 0에서 부터 시작해 가장 먼저 엄마,아빠을 그리고 점점 형, 누나, 동생, 친구, 선생님과 같은 타인을 자신의 의미있는 범위에 편입시켜가며 반지름을 늘려간다. 이후 교육에 의해 국가와 중교와 세계에 대한 인식들이 편입되어 가고 그 범위 안의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게 되어 가는 것이다.
당연히 선의 부재가 악의 존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생존을 위해 개인이 발버둥 칠 때 그 개인의 의미있는 범위 밖에 있는 사람은 그 살고자 발버둥치는 사람을 악이라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생존은 곧 내가 누릴 기회와 자원이 줄어듬을 의미하니까.
우리가 사람과 만나고, 연을 만들고, 이어 나가는 것은 그 의미있는 범위에 서로가 속하게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길거리에서 사시미를 휘두르는 조폭이라도 자신의 의미있는 범위의 사람들에게는 가슴 따뜻할 것이고, 그 옛날 신하와 백성들을 발 밑의 개미처럼 쉽게쉽게 죽이라 명했던 폭군들도 자신의 의미있는 범위의 사람들에게는 애틋했을 것이듯, 일반적인 사람들은 되도록 많은 사람들의 의미있는 범위에 들어가고자 노력하며 그럼으로써 자신의 영속적인 안전을 보장받고자 노력한다.
....처절한 고독이 과연 진정한 자유를 의미하는 걸까.
무언가를 목표로 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은 인생에 손 꼽히는 즐거움 중에 하나다.
무언가를 갖고 싶다고 꿈꾸고 하루하루 그것을 얻었을 때의 성취감을 상상하며 살아갈 때의 즐거움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꿈꾸고 그것을 위해 하루하루 노력해 갈 때의 긴장감 타이트한 인생의 숨가쁨.
그런 느낌들이 너무 좋다.
하지만 소유하고 나면, 성취하고 나면, 그렇게나 나를 기쁘게 만들던 것들은 정말이지 한순간에 나에게서
의미를 잃어버린다. 정점에 다다른 순간 그것들은 나에게서 증발해 버린다.
무엇을 이루고, 무엇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은 나에게 성취감이나 정복감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나에게 해방감을 의미한다.
더 이상 그것들을 소유하고 싶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더 이상 그것들을 성취하고 싶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종국에 다다르는 이 해방감이야말로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의 과정이 그토록 즐거운 이유일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모습을 미화한다.
선택의 과정에서 우선 충동적으로 선택하고 나서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과정을 거치듯
부끄럽고 치졸했던 자신의 과거에 어떻게든 이유를 가져다 붙이고 스스로의 변호 논리를 만들어 낸다.
그러는 사이 유치하고 왜소했던 자신의 모습은 내 머리 속에선 어느새 내 것이 아니게 되어 버린다.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자신 마저도 세뇌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리곤 "나는 지금 진지해"라는 표현으로 완벽하게 방어막을 치고 마무리한다.
하지만 자신을 세뇌시킨 그 합리화 논리가 타인에게 먹혀들지 않을 때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타인은 내 안의 유치하고 왜소했던 모습을 보고 있는데 나는 그런 것들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타인들은 계속 나에게 충고와 경고를 하지만 나에게는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의 잡설일 뿐이다.
그리곤 진지하게 폼 잡으며 이야기 한다. "니들이 뭘 알어" 사실 정말로 모르는 것은 나일지도 모르는데
인간은 알 수 없다.
평소 진실하다는 사람조차 그 마음 속에 어떤 그럴싸한 방어막으로 자신의 치부를 감추고 있을지 모른다.
수많은 priciple과 theory를 만들어 낸 과학적 연구 방법이라는 것은
a라는 원인에 c라는 결과가 반복된다면 그 사이의 블랙박스에 b라는 과정이 숨어 있다는 것을 예측하고
a와 c를 d와 f, g와 h로 바꾸어가면서 b가 옳음을 증명해 가게 되는데
일상에서의 인간은 이런 식으로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어느정도 관찰해보고 b라는 것을 알아 냈다고 해도
언제 그 b라는 것을 부정하는 행동을 할지 알 수가 없다.
이런 방법으로 인간을 이해해 보려 시도하다간 뒤통수 맞기 십상이다.
디버거는 바라지도 않는다. 인간의 속을 덤프 떠서 찬찬히 읽어볼 수라도 잇으면 좋으련만... 정말 어렵다.
그 어렵다는 게 정말 다행일 때도 있지만 대부분 인간 사회의 충돌과 대립은 그것으로부터 시작 됨을
부정할 수 없다.
스스로를 합리화 시켜 버리기 때문에 일단 내 문제가 되어 버리면 b라는 것은 a가 되기도 하고 z가 되기도 한다.
문제의 본질이 흐려지고 그 뒤에 남은 건 진흙탕 싸움 뿐.
전쟁과 범죄는 필연적이다.
선택의 과정에서 우선 충동적으로 선택하고 나서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과정을 거치듯
부끄럽고 치졸했던 자신의 과거에 어떻게든 이유를 가져다 붙이고 스스로의 변호 논리를 만들어 낸다.
그러는 사이 유치하고 왜소했던 자신의 모습은 내 머리 속에선 어느새 내 것이 아니게 되어 버린다.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자신 마저도 세뇌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리곤 "나는 지금 진지해"라는 표현으로 완벽하게 방어막을 치고 마무리한다.
하지만 자신을 세뇌시킨 그 합리화 논리가 타인에게 먹혀들지 않을 때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타인은 내 안의 유치하고 왜소했던 모습을 보고 있는데 나는 그런 것들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타인들은 계속 나에게 충고와 경고를 하지만 나에게는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의 잡설일 뿐이다.
그리곤 진지하게 폼 잡으며 이야기 한다. "니들이 뭘 알어" 사실 정말로 모르는 것은 나일지도 모르는데
인간은 알 수 없다.
평소 진실하다는 사람조차 그 마음 속에 어떤 그럴싸한 방어막으로 자신의 치부를 감추고 있을지 모른다.
수많은 priciple과 theory를 만들어 낸 과학적 연구 방법이라는 것은
a라는 원인에 c라는 결과가 반복된다면 그 사이의 블랙박스에 b라는 과정이 숨어 있다는 것을 예측하고
a와 c를 d와 f, g와 h로 바꾸어가면서 b가 옳음을 증명해 가게 되는데
일상에서의 인간은 이런 식으로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어느정도 관찰해보고 b라는 것을 알아 냈다고 해도
언제 그 b라는 것을 부정하는 행동을 할지 알 수가 없다.
이런 방법으로 인간을 이해해 보려 시도하다간 뒤통수 맞기 십상이다.
디버거는 바라지도 않는다. 인간의 속을 덤프 떠서 찬찬히 읽어볼 수라도 잇으면 좋으련만... 정말 어렵다.
그 어렵다는 게 정말 다행일 때도 있지만 대부분 인간 사회의 충돌과 대립은 그것으로부터 시작 됨을
부정할 수 없다.
스스로를 합리화 시켜 버리기 때문에 일단 내 문제가 되어 버리면 b라는 것은 a가 되기도 하고 z가 되기도 한다.
문제의 본질이 흐려지고 그 뒤에 남은 건 진흙탕 싸움 뿐.
전쟁과 범죄는 필연적이다.


사람의 꿈이 한 가지 밖에 없을리 없고 그 중 어떤 꿈으로 인생이 최종 귀결 될지 알 수도 없지만
누군가 나에게 정말 고르고 고르고 골라서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는 꿈이 뭐냐고 묻는다면
바로 이런 집에서 살아 보는 것이다 말하겠다.
난 세상에 그리 미련이 많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정말 죽기 전에 한 번
저런 집에서 책을 읽어 보고 싶고, 붓글씨 쓰고 밤에 별을 보며 술 한 들이키다 잠들고 싶다.
가끔가다 마루에 앉아 기타 치면서 노래 부르며 살아보고 싶다.
여지없는 한량이지만 그래보고 싶다. 그렇게 한 번 살아보고 싶다.
군대에서든 사회에서는 동기들로만 이루어진 조직이 아니면 어디에서나 어김없이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있다.
" 우리 때는 안그랬다. 요즘 애들 왜 이러냐. 말세다 말세야 "
내가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웃기지만, 내 후배들이 그 후배들을 보면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의도치 않은 염화미소가 띄어지곤 한다. 씨익ㅋ
세대마다 공유했던 문화적 요소들의 상이함에 그 기초를 두고 있을 이 세대차이는 근래에는 인터넷 때문에 한 번 크게 벌어졌을 것이고, 또 7차 교육과정 개정 때문에 한 번, 그리고 모바일 때문에 또 다시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건 내 짧은 식견으로 나누어보는 구분이지만 이제 곧 30을 달려가는(쿠..쿨럭) 인생을 살아오면서 진화론에 있어서의 대진화에 해당하는 학생세대의 변곡점은 이러했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그 7차 교육과정 개정(아마 지금 고딩 애들은 8차 이야기도 나오던데;;;) 으로 인한 세대차이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싶다. 세세한 걸 따지고 들어가면 머리 아프고 6차와 7차 교육과정의 교육 목표만 비교해보면 6차는 평균적 인간 양성!! 7차는 독창적, 창의적 인간 양성!!이 되겠다.
이 교육목표의 차이를 대학신입생을 대상으로 침소봉대 하자면
나로 대표되는 6차 교육과정의 희생양들은 (가드밴드 넣고 06학번까지? )일단 어느 조직에 들어가게 되면 모든 권리을 제로로 만들어 놓고 시작했다. 선배들이야 자유롭게 생활하라고 하지만 우리 세대에 있어서의 자유라 함은 핏빛 의미의 분홍빛 표현이었다. 말 그래도 자유롭게 행동해도 되지만 그 범위는 언제나 당연하게 허용가능한 범위여야 했고 그 범위를 알리없는 뉴비들은 자신들의 행동 가능 리스트를 초기화 시켜 놓고 선배들의 모습을 관찰하며 리스트에 해도 되는 일을 하나씩 추가해야 했다. 그렇게 자신에게 있어 자유의 의미를 천천히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 평균적 인간 양성의 기치아래 교육 받아온 우리 6차 인생들이었다.
하지만 7차 교육과정인들은, (같은 희생양끼리 내외 하자니 좀 그렇군) 독창적, 창의적 인간 양성의 요람 속에 교육 받은 그 아해들은 어느 조직에 들어가게 되면 모든 권리를 100%에 가깝게 만들어 놓고 시작하는 것 같다. 일단은 모든 게 가능한 상태에서 하나하나 지적을 받으면 가능리스트가 아니라 불가능리스트에 추가시켜 나가는 것이다. 6차 인생들이 자유를 하나씩 학습해 나갔다면 7차 인생은 규제를 하나씩 학습해 나간다. 6차인은 자유를 교육시켜야 했던 시대라고 하면 7차인은 규제와 절제를 교육시켜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아.
물론 이 시각은 서두에서 말한 '요즘 것들은 버릇이 없어' 에서 그닥 벗어나지 않는 내용이지만, 왠지 모르게 나를 납득시키고 있다 -_-;;; 집단주의에서 개인주의로의 전환은 내 세대에서도 이전 세대의 선배들에게 그 요즘 것들은 으로 시작하는 충고를 들을 때마다 배경 논리로 사용되던 것이었는데 요즘에는 그게 가속화 되...쿠..쿨럭. ( 몇 년 동안 가속화 되고 있는 건지 ㅋㅋ)
아무튼 돌고돈다 패션도 그렇고 기후도 그렇고 지구도 그렇고 역사도 그렇고 사상도 그리고 애들의 개념없음도 ㅋ
" 우리 때는 안그랬다. 요즘 애들 왜 이러냐. 말세다 말세야 "
내가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웃기지만, 내 후배들이 그 후배들을 보면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의도치 않은 염화미소가 띄어지곤 한다. 씨익ㅋ
세대마다 공유했던 문화적 요소들의 상이함에 그 기초를 두고 있을 이 세대차이는 근래에는 인터넷 때문에 한 번 크게 벌어졌을 것이고, 또 7차 교육과정 개정 때문에 한 번, 그리고 모바일 때문에 또 다시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건 내 짧은 식견으로 나누어보는 구분이지만 이제 곧 30을 달려가는(쿠..쿨럭) 인생을 살아오면서 진화론에 있어서의 대진화에 해당하는 학생세대의 변곡점은 이러했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그 7차 교육과정 개정(아마 지금 고딩 애들은 8차 이야기도 나오던데;;;) 으로 인한 세대차이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싶다. 세세한 걸 따지고 들어가면 머리 아프고 6차와 7차 교육과정의 교육 목표만 비교해보면 6차는 평균적 인간 양성!! 7차는 독창적, 창의적 인간 양성!!이 되겠다.
이 교육목표의 차이를 대학신입생을 대상으로 침소봉대 하자면
나로 대표되는 6차 교육과정의 희생양들은 (가드밴드 넣고 06학번까지? )일단 어느 조직에 들어가게 되면 모든 권리을 제로로 만들어 놓고 시작했다. 선배들이야 자유롭게 생활하라고 하지만 우리 세대에 있어서의 자유라 함은 핏빛 의미의 분홍빛 표현이었다. 말 그래도 자유롭게 행동해도 되지만 그 범위는 언제나 당연하게 허용가능한 범위여야 했고 그 범위를 알리없는 뉴비들은 자신들의 행동 가능 리스트를 초기화 시켜 놓고 선배들의 모습을 관찰하며 리스트에 해도 되는 일을 하나씩 추가해야 했다. 그렇게 자신에게 있어 자유의 의미를 천천히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 평균적 인간 양성의 기치아래 교육 받아온 우리 6차 인생들이었다.
하지만 7차 교육과정인들은, (같은 희생양끼리 내외 하자니 좀 그렇군) 독창적, 창의적 인간 양성의 요람 속에 교육 받은 그 아해들은 어느 조직에 들어가게 되면 모든 권리를 100%에 가깝게 만들어 놓고 시작하는 것 같다. 일단은 모든 게 가능한 상태에서 하나하나 지적을 받으면 가능리스트가 아니라 불가능리스트에 추가시켜 나가는 것이다. 6차 인생들이 자유를 하나씩 학습해 나갔다면 7차 인생은 규제를 하나씩 학습해 나간다. 6차인은 자유를 교육시켜야 했던 시대라고 하면 7차인은 규제와 절제를 교육시켜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아.
물론 이 시각은 서두에서 말한 '요즘 것들은 버릇이 없어' 에서 그닥 벗어나지 않는 내용이지만, 왠지 모르게 나를 납득시키고 있다 -_-;;; 집단주의에서 개인주의로의 전환은 내 세대에서도 이전 세대의 선배들에게 그 요즘 것들은 으로 시작하는 충고를 들을 때마다 배경 논리로 사용되던 것이었는데 요즘에는 그게 가속화 되...쿠..쿨럭. ( 몇 년 동안 가속화 되고 있는 건지 ㅋㅋ)
아무튼 돌고돈다 패션도 그렇고 기후도 그렇고 지구도 그렇고 역사도 그렇고 사상도 그리고 애들의 개념없음도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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쑤지Q 2010/02/25 18:00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형님..
na;Tle 2010/02/26 12:40 편집/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
헐..의도한 건 아닌데 써 놓고 보니 그렇게 걸치게 되는군.
그렇다고 술은 먹지 말고 담배도 피우지 말고 건강하게 자라세염~